분류 전체보기32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생각보다 드물다 지난주에 30년 지기 고등학교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커피숍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적이 흘렀다. 이상하게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보통 지인들과 있을 때는 몇 초만 조용해져도 어색해서 나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그 친구와는 한참 대화가 끊어져도 괜찮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만 만지작거리며 잠깐 창밖을 보고 있어도 조급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오래 알고 지낸 관계에서는 침묵도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까. 같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 긴장되지 않았고 신기하게 힘이 들지 않았다. 괜히 반응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됐고 말을 골라서 하지 않아도 됐다. 무슨 말을 할까를 계속 의식하지 않으니 몸이 먼저 느슨해지는 기분도 있었다. 웃기게도 그날 가장 인상적.. 2026. 3. 13. 비싸면 진짜 같고 싸면 의심부터 되는 이유 특정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사려고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품절이었다. 같은 모델을 포털 사이트에서 다시 검색해봤더니 가격이 정말 제각각이었다. 평소 같으면 최저가부터 봤을 텐데 그런 날은 이상하게 비싼 쪽이 더 진짜 같이 느껴졌다. 직접 만져본 것도 아니고 판매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도 가격이 높은 쪽에 더 믿음이 갔다.그 순간의 내 판단은 단순했다. 비싸면 적어도 가짜는 아닐 것 같고 비싸면 뭔가 더 믿을 만할 것 같았다.실제로는 화면만 보고 있었을 뿐인데 마음은 이상하게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최저가 판매처를 눌러봤다가도 상세페이지가 조금 허술해 보이면 다시 나왔다. 배송이 늦을 수도 있다는 문장 하나만 봐도 더 불안해졌다. 반대로 가격이 조금 더 높은 판매처는 설명이 아주 특별하지 않아도.. 2026. 3. 12. 깊이 잔 다음 날 아침은 느낌이 다르다 평소 아침은 비슷하다. 알람이 울리면 눈은 뜨는데 몸이 바로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치는 느낌이 든다. 세수하러 가는 몇 걸음도 괜히 무겁고 커피를 마셔도 정신만 겨우 붙는 날이 많다.몸이 덜 깬 것 같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꼭 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아침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마음이 먼저 지쳐 있다.그런데 오랜만에 깊이 잔 날은 조금 다르다. 똑같은 집이고 똑같은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침의 느낌이 달라진다. 전날 밤에는 괜히 마음에 걸리던 말이 있었고 자꾸 되감기듯 떠오르던 장면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아침에는 아주 조금 멀어진다. 없어진 건 아닌데 눈 뜨자마자 나를 덮치지는 않는다.분명 상황은 그대로인데 왜 마음은 다.. 2026. 3. 11. 라푼젤은 왜 탑 밖을 원하면서도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라푼젤이 탑 밖으로 처음 나온 직후 장면을 기억한다. 풀밭을 뒹굴며 환호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나 나쁜 아이인 거야” 하며 울고, 다시 신나서 뛰어다니다가 또 멈추고 무너진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장면이 귀엽고 우스웠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몇 초짜리 감정의 널뛰기가 더 오래 남았다. 그렇게 원했던 순간인데 왜 저렇게 기쁨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올라왔을까.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라푼젤이 단순히 겁이 많아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하던 탑 밖에 나왔는데도 바로 편안해지지 못한다. 오히려 기쁨과 불안이 번갈아 올라오고 자유를 손에 넣은 순간에 스스로를 탓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개그처럼 지나가기보다, 오래 통제된 사람이 자유 앞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 2026. 3. 11. 니모를 찾아서에서 말린의 통제는 정말 과한 것일까 어릴 때 『니모를 찾아서』를 처음 봤을 때는 말린이 그냥 답답한 아빠처럼만 보였다.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세상은 실제로 위험한 곳이고 아이에게 늘 조심하라고 말하게 되는 부모의 마음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나 역시 아이들에게 무작정 부딪혀보라고 하기보다는 위험한 건 피하고 한 번 더 살피라고 말하는 편이다.말린의 통제는 정말 과한 것이기만 했을까.말린은 분명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그런데 그걸 단순히 성격 문제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너무 사랑하고 잃고 싶지 않아서 더 조심시키고 막아두려는 마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말린은 왜 그렇게까지 조심시키려 했을까영화 초반의 말린은 늘 최악의 상황을 먼저 떠올린다. 세상은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어서 소중.. 2026. 3. 10. 돈의 가장 큰 역할은 ‘선택권’을 주는 것 『돈의 심리학』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기록나는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고 수입도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했다.처음에는 괜찮았다.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니까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버거워졌다. 일정이 겹치고 장거리 출장도 잦았고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다.겉으로 보면 그냥 일이 많아진 정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쪽에서는 조금 달랐다. 하루를 다 쓰고도 내가 원하는 일은 하나도 못 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일이 내 시간을 끌고 가는 쪽에 가까워졌다.그만둘지 말지 오래 고민.. 2026. 3. 9. 여행은 사치일까, 회복일까 『돈의 심리학』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기록추운 겨울이 되면 자꾸 따뜻한 나라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떠오른다.회색 하늘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가 뜨거운 공기와 햇빛을 상상하면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일상에 지쳐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집중도 잘 안 되고 그냥 멈추고 싶은 상태일수록 더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그럴 때 여행을 다녀오면 분명히 뭔가는 달라진다. 돌아오자마자 큰일을 해내는 건 아니다. 오히려 며칠은 피곤하다. 빨래도 쌓여 있고 밀린 일도 그대로다. 그런데도 묘하게 머릿속이 정리되어 있다. “이제 다시 해보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멈춰 있던 일을 다시 꺼내볼 마음이 생긴다. 즉각적인 성과는 없어도 방향은 조금 또렷해진다.그래서 가끔 스.. 2026. 3. 8. 주식, 손해를 인정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처음 주식을 했다가 물렸다.오를 줄 알고 샀고 사자마자 떨어졌는데도 팔지 못했다. “언젠가 본전은 오겠지”라는 말로 1년을 버텼다. 전혀 오를 생각을 안 해서 결국 80% 손해를 보고 다 팔아버렸다. 팔고 나서 후련했냐고 하면 아니었다. 단지 허탈했을 뿐이다. “다신 주식 하나 봐라”라는 말이 그냥 나왔다.지금도 주식계좌에 소량 잔금은 남아 있다. 몇 년째 방치된 상태로 로그인하는 방법도 잊었고 이젠 거들떠보기도 싫다. 주식 시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랑은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돌아보면 더 이상하다. 왜 1년 동안 못 팔았을까. 내려가는 걸 보면서도 왜 그냥 붙들고 있었을까.나는 그때 돈을 못 놓은 게 아니었다.손해를 확정 짓는 순간을 못 견뎠다.팔지 않은 손해는 아직 숫자다. 빨간색.. 2026. 3. 7.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