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8

반장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반장이라는 이름이 탐났던 것 같다 저는 원래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발표보다 뒤에서 준비하는 쪽이 편했고 사람들 시선이 한꺼번에 모이는 자리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반장 선거 시즌만 되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직접 나가고 싶다기보다, 아주 잠깐 “나도 한 번쯤 해볼까” 같은 생각이 스치곤 했습니다. 실속도 없고 귀찮기만 할 게 뻔한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했던 건 그 마음 자체보다 그 마음이 나와 잘 안 어울린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 나서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직책은 탐낸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우스웠습니다. 실제로 반장이 되면 해야 할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심부름도 싫었고 조회 시간에 앞에 서는 것도 싫었고 친구.. 2026. 3. 22.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때 왜 현실을 놓치게 될까 토이 스토리를 다시 보다 보면 버즈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자꾸 멈추게 된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충격적인 장면처럼 지나갔는데 나중에는 그 선택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버즈는 자신이 장난감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도 믿지 않는다. 광고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도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신호를 봐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진짜 우주 레인저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결국 창문에서 뛴다. 결과는 추락이다.예전에는 저 장면을 보면서 버즈가 현실 감각이 없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저 장면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도 한동안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을 “아직 때가 아닌 것”으로 해석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신호도 있었고 주변의 조언도 있었고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느낌도.. 2026. 3. 15.
첫인상은 잠깐 같지만 오래 남는다 첫인상은 처음에만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처음에 무뚝뚝하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먼저 커피를 건넸을 때 내 안에서 제일 먼저 올라온 건 고마움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왜 저러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반응이 더 이상하다. 친절한 행동을 받았는데도 그걸 바로 친절로 읽지 못했으니까.그때는 그냥 지나갔다. 사람에 따라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 장면이 계속 남았다. 내가 불편했던 건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이 처음에 내가 만들어놓은 인상과 잘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을 새롭게 본 게 아니라 이미 끼고 있던 렌즈로 다시 보고 있었다.그 사.. 2026. 3. 14.
공짜라 잘 선택한 줄 알았는데 손해를 보고 있었다 배송비 3천 원을 아끼려다가 만오천 원을 더 쓴 날이 있었다. 밤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쓸 계란이랑 우유가 없다는 걸 알고 급하게 앱을 켰다. 필요한 것만 담고 결제하려는 순간 배송비가 눈에 들어왔다. 무료배송 기준까지는 3천 원이 부족했다.그때부터 이상하게 내 장 보는 목적이 바뀌었다. 원래 하려던 일은 내일 아침에 필요한 걸 사는 것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진짜 필요한가”보다 “배송비를 내고 싶지 않다”가 더 중요해졌다. 마땅한 3천 원짜리 물건을 못 찾았다가 그나마 필요했던 만 오천 원짜리 사과를 결국 담았고 결제를 끝내고 나서야 내가 지금 뭘 한 건지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계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합리적인 소비로 느껴졌다. 사과가 꼭 .. 2026. 3. 14.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생각보다 드물다 지난주에 30년 지기 고등학교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커피숍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적이 흘렀다. 이상하게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보통 지인들과 있을 때는 몇 초만 조용해져도 어색해서 나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그 친구와는 한참 대화가 끊어져도 괜찮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만 만지작거리며 잠깐 창밖을 보고 있어도 조급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오래 알고 지낸 관계에서는 침묵도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까. 같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 긴장되지 않았고 신기하게 힘이 들지 않았다. 괜히 반응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됐고 말을 골라서 하지 않아도 됐다. 무슨 말을 할까를 계속 의식하지 않으니 몸이 먼저 느슨해지는 기분도 있었다. 웃기게도 그날 가장 인상적.. 2026. 3. 13.
비싸면 진짜 같고 싸면 의심부터 되는 이유 특정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사려고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품절이었다. 같은 모델을 포털 사이트에서 다시 검색해봤더니 가격이 정말 제각각이었다. 평소 같으면 최저가부터 봤을 텐데 그런 날은 이상하게 비싼 쪽이 더 진짜 같이 느껴졌다. 직접 만져본 것도 아니고 판매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도 가격이 높은 쪽에 더 믿음이 갔다.그 순간의 내 판단은 단순했다. 비싸면 적어도 가짜는 아닐 것 같고 비싸면 뭔가 더 믿을 만할 것 같았다.실제로는 화면만 보고 있었을 뿐인데 마음은 이상하게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최저가 판매처를 눌러봤다가도 상세페이지가 조금 허술해 보이면 다시 나왔다. 배송이 늦을 수도 있다는 문장 하나만 봐도 더 불안해졌다. 반대로 가격이 조금 더 높은 판매처는 설명이 아주 특별하지 않아도.. 2026. 3. 12.
깊이 잔 다음 날 아침은 느낌이 다르다 평소 아침은 비슷하다. 알람이 울리면 눈은 뜨는데 몸이 바로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치는 느낌이 든다. 세수하러 가는 몇 걸음도 괜히 무겁고 커피를 마셔도 정신만 겨우 붙는 날이 많다.몸이 덜 깬 것 같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꼭 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아침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마음이 먼저 지쳐 있다.그런데 오랜만에 깊이 잔 날은 조금 다르다. 똑같은 집이고 똑같은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침의 느낌이 달라진다. 전날 밤에는 괜히 마음에 걸리던 말이 있었고 자꾸 되감기듯 떠오르던 장면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아침에는 아주 조금 멀어진다. 없어진 건 아닌데 눈 뜨자마자 나를 덮치지는 않는다.분명 상황은 그대로인데 왜 마음은 다.. 2026. 3. 11.
라푼젤은 왜 탑 밖을 원하면서도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라푼젤이 탑 밖으로 처음 나온 직후 장면을 기억한다. 풀밭을 뒹굴며 환호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나 나쁜 아이인 거야” 하며 울고, 다시 신나서 뛰어다니다가 또 멈추고 무너진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장면이 귀엽고 우스웠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몇 초짜리 감정의 널뛰기가 더 오래 남았다. 그렇게 원했던 순간인데 왜 저렇게 기쁨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올라왔을까.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라푼젤이 단순히 겁이 많아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하던 탑 밖에 나왔는데도 바로 편안해지지 못한다. 오히려 기쁨과 불안이 번갈아 올라오고 자유를 손에 넣은 순간에 스스로를 탓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개그처럼 지나가기보다, 오래 통제된 사람이 자유 앞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 2026.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