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발표보다 뒤에서 준비하는 쪽이 편했고 사람들 시선이 한꺼번에 모이는 자리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반장 선거 시즌만 되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직접 나가고 싶다기보다, 아주 잠깐 “나도 한 번쯤 해볼까” 같은 생각이 스치곤 했습니다. 실속도 없고 귀찮기만 할 게 뻔한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했던 건 그 마음 자체보다 그 마음이 나와 잘 안 어울린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 나서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직책은 탐낸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우스웠습니다. 실제로 반장이 되면 해야 할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심부름도 싫었고 조회 시간에 앞에 서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애매한 일을 맡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반장’이라는 두 글자는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원했던 건 역할이라기보다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장 선거 전날의 교실 분위기도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흔듭니다. 평소 조용하던 애가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누군가는 아침부터 과자를 돌립니다. 그런 걸 보면서 겉으로는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칠판에 내 이름이 적히는 장면을 잠깐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고 싶지는 않은데 완전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던 그 마음. 저는 그게 꽤 오래 민망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 갖고 싶은 이름이 있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을 그냥 허영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해야 할 일은 싫어하면서 이름만 탐내는 건 좀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런 마음을 무조건 이상하게 볼 필요만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집단 안에서 자기가 의미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꽤 자연스럽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슬로는 인간의 동기 안에 존중의 욕구를 포함시켰고(Maslow, 1943), 타즈펠과 터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기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Tajfel & Turner, 1979). 그런 관점으로 보면 반장이라는 자리가 끌렸던 것도 단순히 권력을 잡고 싶어서라기보다, 이 집단 안에서 인정받는 위치를 잠깐 상상해봤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 반 반장’이라는 이름은 그냥 역할이 아니라, 내가 이 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는 감각과도 붙어 있으니까요.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직책에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이 주는 인정의 느낌에 마음이 먼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은 그쪽에 더 가까웠다고 봅니다. 반장이 되어서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었다기보다, 반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의 기분을 잠깐 탐냈던 것 같습니다.
내 경우에는 역할보다 이름의 상징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마음을 너무 좋게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보편적이라고 해서, 내가 품었던 마음까지 다 그럴듯하게 포장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 경우에는 집단에 기여하고 싶다거나 책임을 맡아보고 싶다는 쪽보다, 그냥 그 이름이 한번 붙어 보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실제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이름은 탐났다면, 그건 솔직히 허영에 가까운 마음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걸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조금 덜 민망해졌습니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똑같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행동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 전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반장 선거 때 과자를 돌리는 아이를 보며 “너무 티 난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같은 마음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저는 상상으로만 끝냈고 그 아이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마음을 너무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부 허영이었다고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어떤 이름이 주는 상징에 끌릴 수 있고, 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에 나서기 싫었던 내가 반장을 잠깐 꿈꿨던 이유도, 결국은 역할보다 그 이름이 주는 기분이 먼저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 이 글은 심리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해석 글입니다. 누구나 비슷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를 좋고 나쁨으로 단정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참고문헌
Maslow, A. H. (1943).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4), 370–396.
Tajfel, H., & Turner, J. C. (1979). An integrative theory of intergroup conflict. In W. G. Austin & S. Worchel (Eds.), The social psychology of intergroup relations (pp. 33–47). Brooks/C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