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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에세이

로또 한 장이 주는 기대감에 대하여

by Min K 2026. 3. 7.

나는 로또를 두 번밖에 안 사봤다. 한 번은 그냥 궁금해서였고 한 번은 주변에서 같이 사자고 해서였다. 살 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런데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는 금방 잊었다. 얼마나 잊었냐면 5천원이 당첨됐는데도 2년 동안 찾지 않아서 결국 못 찾았다. 당첨됐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

반면 주변을 보면 매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될 거야.” “거기가 명당이래.” 같은 말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냥 습관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습관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매주 결과가 아니라,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의 마음을 같이 사는 듯했다.

특히 추첨날 저녁이 되면 그게 더 또렷해진다. TV를 켜놓고도 바로 확인하지 않는다. “아직 안 봤어” 하면서 일부러 몇 분을 끌기도 하고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괜히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 잠깐의 뜸 들임이 이상하게 진지하다. 당첨될 가능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짧은 시간만큼은 “혹시”라는 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로또는 당첨을 사는 것보다 발표 전 며칠의 “혹시”를 사는 쪽에 더 가깝다.

사는 순간의 기분이 이미 값어치를 한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잠깐은 다른 인생을 상상할 수 있다.

로또를 사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생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혹시 되면 어떡하지”를 상상할 수 있다. 퇴직하고 싶다, 집을 사고 싶다, 부모님께 뭔가 해드리고 싶다. 그 상상은 생각보다 선명하고 생각보다 즐겁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한 주를 버티게 하는 작은 숨구멍이 되기도 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이 아주 낮은 확률도 0이 아니면 실제보다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이런 걸 확률 가중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Kahneman & Tversky, 1979). 1등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걸 알아도 “그래도 나한테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조금 닿아 있다.

그래서 로또 한 장의 값은 단지 숫자의 값이 아니라 그 주의 기분 일부를 담는 가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사는 건 종이 한 장인데 마음은 그걸 미래의 가능성처럼 받아들이는 셈이다.

“명당”을 믿는 이유는 확률보다 손잡이가 필요해서다

확률은 같아도 사람은 내가 고른 느낌을 놓치기 싫어한다.

특정 복권방이 명당이라는 말이 퍼지면 거기서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논리적으로는 어디서 사든 확률이 같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만 움직이지 않는다. 어디서 사는지, 번호를 직접 고르는지, 몇 시에 사는지 같은 요소들이 결과에 영향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향을 통제감 착각으로 설명해왔다(Langer, 1975). 완전히 운에 맡기는 것보다 내가 뭔가를 선택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 기대가 조금 더 붙는다. 명당을 찾아가는 것도 결국 그 기대를 붙잡아둘 손잡이를 만드는 행동에 가깝다. 합리적이라기보다 마음이 흔들릴 때 붙드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운 앞에서조차 아무것도 안 한 채 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번호를 고르거나 장소를 고르거나 시간을 맞추는 일은 결과를 바꾸기보다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만든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감각이 당첨 가능성만큼 중요할 수도 있다.

매주 사는 사람들이 꼭 어리석은 건 아니다

돈을 쓰는 이유는 늘 계산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5천원이 당첨됐는데도 2년 동안 찾지 않은 나는 사실 로또에 큰 기대가 없었던 편이다. 그래서 잊었다. 반대로 매주 사는 사람들은 그 한 장이 만드는 “며칠의 기분”을 매주 산다. 물론 매주 사는 게 재정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인지는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그걸 단순히 돈 낭비로만 보면 그 사람이 그 한 장에서 얻고 있는 게 무엇인지 놓치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로또를 자주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매주 사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마음은 없어졌다. 그 한 장이 그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다. 로또가 인생을 바꾸는 티켓이 되기는 어렵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이번 주를 버티는 연료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로또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꼭 당첨을 사는 게 아니라, 결과가 정해지기 전까지의 마음을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한 장이 현실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전까지의 며칠을 조금 다르게 버티게 만드는 힘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매주 사는 사람을 예전처럼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됐다. 그 한 장이 만들어내는 건 숫자보다 기대의 시간에 더 가까워 보여서다.

※ 이 글은 심리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해석 글입니다. 개인의 재무 상황에 대한 전문적 자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Kahneman, D., & Tversky, A. (1979). Prospect theory: An analysis of decision under risk. Econometrica, 47(2), 263–291.

Langer, E. J. (1975). The illusion of contr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32(2), 311–328.